08:20 3호선 불광역.
아무도 안 나올 게 뻔한 친구들이지만 그래도 기다리는 마음이 야릇한 즐거움을 준다. 기다림-바람맞음 또는 자기환상-자기환멸로 이어지는 가학-피가학의 고리가 어디 어제 오늘에 끊어질 일이던가.
08:55 슬슬 신발끈을 조이고 일어나 쪽두리봉(꼭지봉 또는
수리봉)을 향한다. 어김없이 목을 지키고 있어야 할 아저씨 오늘은 웬일인지 안보이니 일점 섭섭함이 있으나 1300원을 절약함 또한 기분이 괜찮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 왕창 내린 비가 씻어 놓은 대기의 청량함이 기꺼운데 불과 10분에 벌써 육수가 줄줄 흘러대니 오늘 전정이 만만치 않을 것 같다. 순간 적당한 계곡 서늘한 그늘을 찾아 낮잠이나 뽀개고 끝낼까 하는 유혹이.... 이럴 때를 위해 이미 선인이 "愼其獨"해야 군자라고 경계해 놓은 바 있으려니, 거친 숨 몰아 세우며 쪽두리정상을 향해 그런대로 바위맛을 느끼게 해 주는 슬랩을 치고 오른다. 항상 옆에 붙어서 코취하고 잡아 주던 동생들이 없음에 순간 순간 느껴지는 불안함이 오히려 달착지근하다. 쪽두리봉 정상에 서니(09:10) 사위가 탁트이며 맑은 공기 덕에 시야가 훌륭하다. 이미 적지 않은 사람들이 올라와 사진도 찍으며 자기들이 해낸 일을 스스로 대견해 하느라고 시끄럽다.
이제부터 삼지봉쪽으로의 하강길이 상당히 신경 쓰이는 바 있어 그들 중 가장 노련해 보이는 그룹을 눈여겨 보아 두었다가 그 뒤로 바짝 따라 붙어 만약의 경우에 대비하고 하강을 시작한다. 역시 두번의 경험이 있는지라 그런대로 안정된 자세로 내려가다 보니 마지막 핏취에서 슬그머니 욕심이 생긴다. 왼쪽 슬랩이 아니라 오른쪽 크랙을 타봐? 아니지. 知止不殆라 했거늘. 왼쪽 사면으로 사뿐히 내려서 일로 삼지봉으로 올라 날등을 타고 바윗길을 즐기다 끝 부분에서 잠시 쉴 자리를 찾아 보는데 방마다 꽉차있어 여의치 않다.
그대로 비봉을 향해 내리막길로 접어 드는데 어디서 "광호야!"하고 부르는 소리 있어 뒤돌아 보니 모습은 희미하지만
목소리와 짝지어 보관대 상윤이가 분명쿠나! 이게 웬일 하고 줄달음으로 가보니 과연 왕공 상윤이라. 동부인하여
극진한 부부지정을 산행으로 과시하던 중에 부인 효정씨가 나를 발견하셨던 게야. 이리하여 邂逅-作伴의 기쁨을 만끽하며 비봉안부에 이르러 상윤내외의 의중을 물어 보니 비봉등정이 영 마음에 탐탁치 않은 눈치라, 그러면 사모바위에서 재회키로 하고 나 혼자 비봉으로 올랐다가 사모바위에 도착하여 "상윤아" 하고 부르는데, 아니 이건 또 무슨 경운가! 상윤내외가 태평부인 강명희씨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닌가.
혹시 상윤네등과 사전모의가 있었던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순간 스쳐가는 바 없지 않았으나, 태평인 언제나 그렇듯이
새벽 댓바람에 풀뜯어 먹으러(이 친구가 소띤 개비여 암케두) 뛰어 나가고 명희씬 옛동료들과의 산행에 나섰던 길이라 하니 일행 모두가 이 즐거운 해후를 가능케 한 소생이 쳐댄 번개의 가공할 위력에 마냥 놀라울 따름이었다.
명희씨가 같이 온 동료들을 향해 가차없는 배신을 때리고 함께 산행을 계속하여, 맛있는 점심을 문수봉안부에서 나누어 먹고 드디어 떡 버티고 선 문수봉 서사면을 대하고 섰다. 이제부터 상당히 신경을 써야 할 릿쥐가 시작되는 판이라 다시 한번 상윤의 의사를 물으니 어부인의 의사에 일임하는데 효정씨가 당연하다는 투로 직등할 뜻을 천명하고 명희씨 역시 재청 삼청하고 나선다.
조심조심하며 바위 한땀 한땀을 뜯어 이윽고 문수봉상에 올라 서서 사위를 바라보니 겁을 주던 비봉이 쩌 아래 읍하고 있질 않나 오똑 서서 젠체하던 사모바위가 그저 다소곳하니 있는둥 만둥이고 고압적이기만 하던 보현봉이 이제사 한 어깨로 친구하자고 손내밀고 있으니 우리 65산우회 여학생대표 두 분이 그저 싱글생글 그 즐겁고 신나는 모습을 어찌 형언하랴. 행여 내친김에 DITTO낭자군 홀로 이 길에 나서는 일 저어하여 안 그러시겠다는 다짐을 놓고, 청수동암문쪽으로 길을 바꿔 잡아 의상능선으로 향한다.
이런 저런 즐거움과 조망에 시간은 널널히 흘러 청수동암문을 떠난 것이 14:00. 나월-나한-용혈-용출 한 봉 한 봉을 느긋이 밟아 가며 왼쪽에는 비봉능선 납신이요 오른쪽엔 원효 염초능선/주능선 문안이요 하다가 가사당암문에 도착하니 16:00라. 며칠새 내린 비로 물 철철 물 콸콸 흐드러질
백화사 계곡을 마다하면 벌 받쥐. 좌로 방향 바꿔 가! 구령 외치며 계곡 숲길 그 녹음 속으로 뙤약볕에 시달린 머리를 식히며 그늘 좋고 물 좋은 계곡 중류에 좌정. 일동 모두 탁족식을 거행하며 근 여덟시간에 걸친 오늘의 번개맞음을 복습하다가 하산완료한 것이 17:00. 이대로 헤어질 수 없어 구파발전철역 욕쟁이네 맥주집에 들러 일잔하고 19:00
그리운 가족의 품으로 기어 들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