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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고등학교-잊혀진 역사

2011-11-07 09:57:27, Hit : 1673

작성자 : 노상조
경기고등학교  역사라기보다 중등교육 역사라고 해야겠지요.
.
물론 전체를 보려면 당시의 서당과 무허가(? 사립?학당?) 교육기관, 만주이야기  등등의 자료도 있어야하겠지만 자세한 기사이네요 ...., 일전 모인곳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끝에  화제가 되기에.... 마침 이런 자료가 있군요.  서두 부분과 뒷 부분은 좀 기자의 주관적이기도 하지만 그런대로 이해들 하시고...주욱 읽어보면 당시 상황이나  사실, 혹시있을지 모를 과장/축소/위장 된 정체성등도 짐작할수 있겟네요.


開校 100年 京畿高 神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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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천년에 맞이한 개교 1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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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의 중등 교육을 위하여 - 광복 전의 京畿

국민학생 시절 기자는 친지들로부터 "이 다음에 너는 꼭 경기고등학교에 들어가거라"하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어린 시절이지만 기자는 두 가지 느낌을 가졌다. '아, 주위 분들이 내게 큰 기대를 걸고 계시구나'하는 자부심이 하나였고, '이러다 경기고에 못 가면 망신당하겠구나'하는 부담감이 다른 하나였다.

행인지 불행인지 국민학교 6학년이 된 해에 고등학교 입시가 없어졌다 (사실 기자의 실력으로 경기고에 도전했다면 틀림없이 낙방했을 것이다). 기자는 이른바 '뺑뺑이' 4회로 경기고와는 형제관계인 서울의 경복고에 배정되었다. 경복고에 입학하며 속으로 '뺑뺑이긴 하지만 그래도 경기에 버금가는 학교에 진학했구나'하는 안도감을 맛본 기억이 있다.

어린 시절 기자의 가슴 속에 '묵직하게' 자리잡았던 경기고가 개천절인 오는 10월3일로 개교 100주년을 맞는다. 새 천년이 펼쳐진 시기에 한 세기에 걸친 학교 史를 접고 새로운 세기를 열게 된 것이다. '경기고 100년'이 우리 사회에 던진 의미는 도대체 무엇일까? 경기 100년 속에는 한국 중등교육의 전부가 들어 있다.

1885년의 배재학당, 1886년의 이화학당, 1897년 평양의 숭실학교 등이 개교, 이 땅에 교육기관이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조선 땅에 들어온 서양인들이 그들의 언어를 조선말로 통역해줄 사람이 필요해 서당의 4촌쯤 되는 개념으로 학당을 만든 것이다.

신학문을 가르치는 사학 (학당)들이 생겨나자 1886년 9월 대한제국 정부는 미국인 헐버트 등을 교사로 초빙해 '육영공원'이라는 근대식 관학 기관을 만들었다. 육영공원은 정치·경제·수학·영어같은 근대학문을 가르쳤으나, 학생들은 구래의 전통과 특권에 집착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그러자 실망한 외국 교사들은 자국으로 돌아갔고 육영공원은 개교 8년만인 1894년 문을 닫았다.

하지만 개화의 물결은 하루가 다르게 밀려들고 있었다. 1894년 조선보다 먼저 개방한 일본이 '중원의 패자'인 청나라와 전투를 벌여, 하루아침에 승리를 거머쥐었다 (청일전쟁). 조선의 선각자를 자처하던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아이고 세상이 바뀌었구나!" 그래서 그 해에 과거제를 폐지하고 갑오경장이라 불리는 대개혁을 단행했다. 하지만 개화를 추진할 맨파워가 너무 달렸다. "근대화를 이끌어갈 인재를 키워야 한다는 소리가 높았다."

그리하여 정부는 소학교-중학교-대학교의 3체제로 학교를 세운다는 교육개혁안을 의결했다. 이듬해인 1895년 8월 지금의 국립 초등학교에 해당하는 관립 소학교를 처음 열었는데, 이 소학교가 서울 종로구 경운동에 있는 지금의 교동초등학교다. 이때 정부는 학교를 정부가 세우는 관립 학교, 관민(官民)이 공동으로 세우는 공립 학교, 그리고 사립 학교로 구분하였다.

아직 반상(班常)의 차별이 남아 있던 때인지라 교육에서도 차별화가 이루어졌다. 즉 공립과 사립 학교에는 '심상(尋常)과'만 두고, 관립 학교에는 심상과와 더불어 '고등과'를 둔다고 한 것이다. 심상(尋常)은 '대수롭지 않다' '보통이다'는 뜻이니, 심상과는 요즘 말로 하면 '보통과'가 된다. 소학교의 심상과는 3년 과정으로 학업을 마쳐도 상급학교인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다. 반면 고등과는 5년 과정으로 졸업하면 중학교에 진학할 자격을 주었다. 그러니까 공사립 소학교를 나온 학생은 중학교에 진학할 수가 없고, 관립 소학교에서도 고등과를 나온 학생만 중학교에 입학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시절은 예정된 학제를 다 채우지 못하던 때였는지 관립 소학교 고등과는 1897년 7월부터 졸업생(14명)을 배출하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대한제국 정부는 중학교를 출범하기는커녕 중학교는 어떠해야 한다는 관제조차 제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니 관립 소학교는 갈 곳 없는 고등과 졸업생을 배출하는 것이 고통스러워 고등과 운영을 일시 중단하였다.

5년 후인 1900년이 되자 이러한 관립 소학교는 10개로 늘어났는데, 이중 8개교가 한성에 있었다. 그래서 19세기의 마지막 연도인 1899년 4월4일 대한제국 정부는 중학교 관제를 규정한 칙령 11호를 처음 공포하였다. 이때도 역시 공사립 중학교에는 심상과만 두고 관립 중학교에는 심상과와 고등과를 둔다고 했다. 심상과에 입교한 학생은 4년을 마치고 중학교를 졸업하나, 관립중학교 고등과에 들어온 학생은 심상과 4년에 이어 고등과 3년을 마쳐야 졸업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니까 요즘 식으로 말하면 공사립 중학교는 순수한 '중학교'이고, 관립 중학교는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함께 있는 학교인 것이다.

이때 관제는 고등과를 마친 학생은 초급 관리인 '판임관'에 임용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판임관은 지금으로 치면 5급 공무원인 '사무관'쯤에 해당하겠다).

물론 이때도 중학교에 갈 나이의 학생들을 모아 가르치는 여타의 학교가 있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특수목적고에 해당하는데, 외국어를 통역할 역관(譯官)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자, 일어학교(1891년 개교) 영어학교(1894년) 법어학교(프랑스어학교·1895년) 아어학교(러시아어학교·1896년) 한어학교(중국어학교·1897년) 덕어학교(독일어학교·1898년)가 차례로 생겨났다. 지금이나 그때나 외국인을 만나고 외국에도 갈 수 있는 외국어 학교는 인기가 '캡'이었던 것이다.

또 대한제국 정부는 교사를 양성하기 위해 1895년 칙령 79호로 한성사범학교를 설립했는데, 이 사범학교의 인기도 보통이 아니었다. 1899년에는 '의(醫)학교'와 '상공(商工)학교'가 생겼는데 이 학교도 인기였다. 흔히 한국인은 '사농공상(士農工商)'을 따지기 때문에 실용 및 기술 분야가 쇠락했다고 하지만, 청일전쟁을 통해 세상이 바뀌었다는 것을 눈치챈 대한제국인들이 '특수목적고'로 대거 몰렸던 것이다.

그렇다 보니 인문사회과학에 해당하는 '보통학'을 가르치는 학교가 없다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대한제국 정부가 칙령 11호를 공포해 중학교를 만들겠다고 한 것은 보통학을 가르칠 학교를 만들겠다는 의미였다. 그로부터 1년 후인 1900년 9월3일 대한제국 정부는 학부령 제12호를 통해 '중학교 규칙'을 공포했다. 이로써 학과목이 정해지고, 입학 연령은 '17세에서 25세'로 하는 등 제반 규칙이 결정되었다.

하지만 이때 공사립 중학교는 하나도 개교하지 못하고, 관립중학교 단 하나만 한성에 개교했다. 이때 이 학교의 이름이 '관립중학교', 줄여서 그냥 '중학교'였다. 최초의 신문이 '더 타임스'이듯, 최초의 중학교인 경기고등학교는 그냥 '중학교'로 출범하는 영광을 누리게 된 것이다(그러니까 학교 역사가 이미 한 세기가 넘은 배재-경신 등의 명문 사립고는, 당시 보통학을 가르치는 중학교가 아니고 그후 중학교로 변신한 것이다).

이 중학교는 누대에 걸쳐 조선조의 명문거족들이 몰려 살던 '홍현'(紅峴·지금의 서울 종로구 화동) 에서 시작했는데, 공교롭게도 학교 터가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비극적으로 세상을 떠난 김옥균(金玉均)의 집터였다. 김옥균의 집터가 왜 경기고 자리가 됐는지 분명하게 설명해주는 자료는 없다. 다만 '김옥균이 역적으로 몰려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으니, 대한제국 정부는 주인 없는 그의 집터를 징발해 학교 터로 삼은 것 아니겠는가'라고 추정할 수밖에 없다. 어찌되었든 개화된 세상을 꾸려나갈 인재를 육성할 경기고가 개화를 주장하다 죽은 김옥균의 집터에 둥지를 틀게 된 것이다.

김옥균 집터에 들어선 경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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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후 중학교는 개화파 거두로 당시는 외국에 쫓겨가 있던 '역적' 서재필(徐載弼)의 집터도 교사 터로 흡수했다. 김옥균은 후손이 없지만 서재필은 있다. 1970년대 서재필 후손은 경기고 터 중에서 2000여 평은 서재필이 역적으로 몰렸을 때 강제로 빼앗긴 것이라며 대한민국 정부를 상대로 반환 소송을 제기했다. 이 재판에서 정부는 패소했는데, 이로 인해 경기고는 당시 '영동'으로 불리던 서울시 강남구 삼성동 지금의 경기고 자리로 옮기게 됐다.

당시 정부로서는 2000여 평에 대해 금전적인 보상을 해주거나 대토(代土)를 주는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고교 평준화가 막 시작된 직후인지라 박정희 정부는 경기고 동문들의 결사 반대를 무릅쓰고 경기고 이전을 강행했다. 당시 문교부 장관은 경기고 동문인 민관식(閔寬植·33회)씨였는데, 그는 봉은사로부터 지금의 경기고 터를 사들여 학교를 옮기게 했다.

화동 교사는 좁았으나 삼성동 교사는 대학 캠퍼스 못지 않을 정도로 널찍하다(3만여 평). 또 수목이 울창해, 화동 교사에 비하면 교육 환경이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좋았다. 더구나 경기고 이전을 전후해, 삼성동 일대는 새로운 도심이 되고 부촌을 형성했다. 이렇게 되자 대부분의 경기고 동문들은 '이전하기를 잘했다'고 평가하기 시작했다. 화동 출신 졸업생과 삼성동 출신 졸업생이 따로 동문회를 열던 일도 이제는 옛날 이야기가 됐다고 한다.

이처럼 '중학교'는 당시로는 아주 특별한 학교로 출범했기 때문에, 대한제국 정부는 정부의 공식 간행물인 관보에 학생 모집 공고를 내주었다. 당시는 입학원서를 '품청장(稟請狀)'이라고 했다. 최초의 응시자가 몇 명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품청장을 낸 학생 중에서 85명이 '중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경기 1회 졸업생인 이능우(李能雨)씨는 생전에 중학교에 들어가게 된 과정을 회고담에 이렇게 남겨 놓았다 한다.

고등과는 개설하지 못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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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관립소학교 고등과를 마치고 상급학교 진학을 기다리고 있었다. 관립소학교 고등과 선배인 팽종헌 이용태 등은 중학교가 없어서 3년을 대기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재동 부근으로 심부름을 다녀오다가 중학교 선생님에게 붙잡혀 머리를 깎이고 공부를 하게 되었다. 내 선배들도 그때 같이 중학교에 들어갔다.'

당시에는 교사를 '교관'으로 불렀고, 교장은 정3품(지금으로 따지면 4급 서기관쯤 되겠다) 대우를 받았다. 대한제국 정부는 중학교 초대 교장으로는 김각현(金珏鉉)을 임명했으나 김각현은 개교를 보지 못하고 물러나고, 2대 교장 이필균(李弼均)이 개교 교장이 되었다. 1900년 10월3일 중학교는 이필균 교장과 일곱 명의 교관, 그리고 85명의 학생과 함께 개교하였다.

하지만 중학교는 심상과만 운영하고 끝내 고등과를 설치하지 못했다. 지금으로서는 고등과를 설치하지 못한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당시 심상과를 다니던 학생들의 수업 열의가 형편없이 낮았던 것으로 봐서는, '고등과에 지원하는 학생이 없어 고등과를 설치하지 못하지 않았나'라고 추정해볼 뿐이다. 중학교 제1기 입학생들은 4년 후인 1904년 7월 심상과 졸업장을 받게 되는데, 이때 졸업생은 20명에 지나지 않았다. 65명의 학생이 자퇴해버렸던 것이다.

높은 자퇴율은 그후로도 계속된다. 1902년도에는 35명이 입학했으나 4년 후 졸업자는 6명에 불과했다. 1903년 입교생은 39명이었으나 3년 만에 1명을 남기고 모두 자퇴했다. 당황한 중학교 당국은 이 한 명마저 자퇴해버릴까봐 3년 만에 학업을 마치게 하고 1905년 2회 졸업생들과 함께 졸업시켜주었다(그로 인해 1906년에는 단 한 명의 졸업자도 나오지 못했다). 자퇴 현상은 1909년까지 계속되었다.

중학교 자퇴율이 이렇게 높았던 것은 보통학을 써먹을 분야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중학교 출신이 취직할 수 있는 최고 자리는 중학교 교관이었다. 그러나 교관 자리가 거의 없어, 교관 중에서 결원이 생길 때를 기다리는 중학교 졸업자들이 즐비했다. 판임관 임명은 고등과가 개설되지 못한 관계로 '없었던 일'이 되었다. 때문에 학생들은 중학교를 자퇴하고 취직이 잘되는 '특수목적고'로 옮겨가려고 했다. 중학교가 최고 명문 경기고가 되는 데는 좀더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엄청난 자퇴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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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립 소학교 고등과 졸업자만 중학교에 응시하게 한 것도, 중학교를 비인기 학교로 만들게 한 요인이었다. 관립 소학교 고등과 졸업자는 극소수여서 1901년에 15명, 1902년에 16명이었다. 당시 중학교는 50명 정도의 신입생을 뽑았으므로, 지원자격자가 너무 모자랐다. 그래서 규칙을 고쳐, '외국어학교 졸업자와 재기가 뛰어난 학생도 특별히 입학할 수 있다'는 단서 조항을 삽입했다. 세월이 흐르자 중학교는 관립 소학교 고등과 출신보다 단서 조항에 따라 입교하는 학생(일반 지원자)이 더 많아졌다.

이렇게 되자 중학교는 요즘 식으로 말하면 우열반 편성쯤에 해당하는 반 편성에 들어갔다. 즉 고등과 출신은 '서반'(西班), 일반 지원자는 '동반'(東班)으로 편성해, 학습 수준을 달리 한 것이다. 서반-동반 구분은 조선조 항교에서 양반 자제는 동재(東齋), 서얼(서자)과 중인의 자제는 서재(西齋)에 머물게 한 전통을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향교에서는 정통을 동재로 모았으나, 중학교에서는 서반으로 모았다. 중학교는 열반에 해당하는 동반을 1904년까지 유지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된 다음 해 우물안 개구리처럼 겨우 명맥을 유지하던 중학교에 변화가 생겼다. 중학교 앞에 '한성'이라는 지명이 붙고, '고등학교'로 개칭된 것이다. 한성이라는 지명을 붙이게 된 것은 일제 통감부의 통제를 받던 대한제국 정부가 한성에 관립 고등여학교를, 그리고 평양에 두 번째 관립 고등학교를 개설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중학교가 한성고등학교로 개칭됐다고 해서 4년제이던 수업 연한이 늘어난 것도, 고등과가 개설된 것도 아니었다. 여전히 중학교 심상과에 해당하는 학문을 가르치며 이름만 고등학교로 바꾼 것이다. 1908년 대한제국 정부는 지금으로 따지면 '여중'에 해당하는 '관립한성고등여학교'를 개교했는데, 이 학교는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 경기고등여학교를 거쳐 최고명문 여고인 경기여고가 된다(경기고 학생이 경기여고생과 '남달리' 오순도순한 관계였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1909년 평양에는 '관립평양고등학교'(그후 평양고보→평양2중이 됐다가 6·25전쟁 후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가 개교했다. 그런데 평양고는 같은 관립인데도 4년제가 아니라 3년제 학교로 출범하였다. 1916년 대구에서는 '관립대구고등학교'(경북고의 전신)가 개교하였다. 여기서 잠시 '경기고'와 '평양고' 대구의 '경북고' 그리고 경기고가 제1고보로 불릴 때 제2고보로 출범한 서울의 '경복고' 사이의 관계를 알아보자. 일본에서는 관립 고등학교를 만들 때부터 설립 순서대로 1고·2고·3고로 이름지었다. 그런데 우리는 관립 고등학교를 한성-평양-대구 등의 지명으로 구분하다가, 나중에 1고보(경기고)와 2고보(경복고)를 붙이는 바람에 혼선이 생겼다.

한성고를 위한 정부의 세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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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4개교 중에서 '제1고'가 경기고라는데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경기고는 교모에 '제1'을 뜻하는 백선(白線) 하나를 둘렀다. 두 번째로 생겨난 평양고는 가는 백선 두 개를 둘러 '2고'임을 내세웠고, 세 번째인 대구의 경북고는 가는 백선 3개로 '3고'임을 주장했다. 그리고 생긴 순서로는 뒤지지만 '2고보'란 호칭을 받았던 서울의 경복고는 아래에는 굵은 백선, 위에는 가는 백선을 친 교모를 써, 이름만은 명실상부하게 '제2고보'였다는 사실을 드러냈다.

한성고등학교로 개칭되던 1906년 대한제국 정부는 칙령 44호를 공포해 소학교를 보통학교로 바꿔 부르게 했다. 동시에 한성고등학교에 수업 연한 1년의 '예과'(豫科) 과정을 뒀는데, 예과를 설치한 것은 한성고의 인기가 형편없었기 때문이다(예과는 고등학교에 설치한 보통학교 고등과에 해당한다). 한성고등학교가 인기가 떨어진 것은 정치적-민족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을사조약 체결 후 일제는 관립 학교에서는 일본어를 주로 가르치게 했다. 그러자 유력 집안에서는 자제들을 한성고등학교 입학이 보장된 관립 보통학교의 고등과가 아니라 사립 보통학교로 보내게 되었다.

이로써 한성고등학교의 인기가 급전직하로 떨어지자, 당황한 대한제국 정부는 사립 보통학교 졸업자도 한성고 예과에 들어와 1년을 공부하면 한성고에 진학할 수 있다는 자격을 주고, 동시에 사립 고등학교를 대대적으로 폐쇄하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유력 집안들은, 다시 자제들을 관립보통학교 고등과에 입학시키거나 한성고 예과에 넣기 시작했다. 이러한 세 몰이는 아마 경기고가 명문이 되는데 중요한 터닝 포인트였을 것이다. 이 제도가 성공을 거두자 1909년 예과를 폐지했다.

1910년 8월 한일합병이 이뤄지고, 그해 10월1일 조선통감부가 조선총독부로 재편되었다. 한성을 경성(京城)으로 개칭한 조선총독부는, 고등학교를 고등보통학교로 바꾸게 했다. 이에 따라 한성고등학교는 '경성고등보통학교(경성고보)'로 개칭되었다. 고등보통학교를 줄여서 고보(高普)라고 하는데, 고보는 일제의 식민지 차별 교육의 전형을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 수 없다.

당시 일본은 소학교 6년-중학교 5년-고등학교 3년-대학교 3년(문과), 4년(이과)의 학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인은 보통학교 3, 4년-고보 4년(그나마 여자고보는 3년)-전문학교 3, 4년만 다니게 했다. 하지만 조선총독부는 조선에 사는 일본인을 위해 일본과 똑같은 6년제 소학교와 5년제 중학교를 개설케 했다(일부 친일파 조선인의 자제들도 이 학교에 입학했다).

조선총독부가 조선에 있는 일본인들을 위해 만든 중학교가 '경성중학교'(1909년 개교)와 '용산중학교'(1917년 개교)였다. 경성중학교에는 총독부에 근무하는 아버지를 둔 일본 학생들이 주로 다녔다. 당시 일본군은 지금의 미 8군 자리에 주둔했는데, 여기서 가까운 학교가 용산중학이었다. 이런 이유로 용산중학교에는 일본군인의 자제가 많이 다녔다(광복 후 경성중은 서울고로, 용산중은 용산고로 새 출발했다).

조선에서 중학교를 마친 일본 학생은 일본에 건너가 고등학교 시험에 응시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고보를 나온 조선인은 일본에 건너가도, 고등학교 입학 시험에 응시할 수 없었다. 그가 고등학교를 거쳐 대학교에 진학하려면, 먼저 중학교 5학년에 편입해 중학교 졸업장을 받아야 했다.

朴烈의 모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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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합병이 되었으니 관립 고보에는 일본인 교장이 취임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912년 4월 경성고보 교장에 일본인 오카 모토스케(岡 元輔·제7대)가 부임했는데, 오카 교장은 역대 일본인 교장 중에서 최장기인 8년 6개월간 재임하며 경기고 역사에 큰 영향을 끼쳤다. 오카 교장은 조선의 중등교육 전체를 좌우하는 조선 총독의 중등교육 자문관이기도 했다. 이러한 공로 때문에 경성제1고보로 불리던 1934년 제1고보는 교정에 오카 교장 흉상을 제막했다. 경기공립중학교이던 1941년 그가 일본 도쿄에서 죽자, 이와무라 도시오(岩村俊雄) 당시 교장은, 자신이 제주가 되어 성대한 학교장을 지내기도 했다.

요즘 대학입시에서도 재능이 뛰어난 일부 학생들은 특차나 (논술)시험 등을 치르지 않고 무시험 전형으로 대학에 들어간다. 그와 마찬가지로 경성고보는, 입학생 중 절반 정도는 시험을 치르지 않고 서류 전형만으로 합격시켰다. 무시험 전형자들은 보통학교 성적이 아주 뛰어나 보통학교 교장의 추천을 받은 학생들이었다. 그때도 '내신'만으로 당락을 결정하는 제도가 있었던 것이다.

시험을 치르고 입교하는 학생들은 대략 15대1의 경쟁률을 뚫어야 했다. 응시생 자체가 13도의 수재들인만큼 15대1의 경쟁률은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이때 경성고보는 교복이 없어, 학생들은 두루마기를 입고 다녔다. 하지만 백선을 하나 넣은 교모는 반드시 쓰고 다녔다. 당시 평양고보는 백선 둘, 대구고보는 백선 셋의 교모를 썼는데, 백선 숫자가 고보의 서열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경성고보 학생들도 참여해 27명이 사법처리를 받았다. 3·1운동은 일본인이 다니는 중학교와 비교했을 때 차별 교육을 받아온 경성고보 학생들을 폭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학생들은 "왜 우리는 보통학을 배우지 못하고 실과 교육만 주로 받느냐" "왜 우리는 중학교가 되지 못하느냐"는 것 등을 이슈로 내걸고 동맹휴학에 돌입했다. 1919년 11월의 동맹 휴학은 경성고보생 3분의 1이 퇴학당할 정도로 거셌다.

이때 경성고보를 자퇴한 학생 중 한 명이 그 유명한 '박열'(朴烈·본명은 朴準植·경기고 16회에 해당)이다. 박열은 그후 일본으로 건너가 재일 조선인 비밀결사체인 혈권단(血拳團)과 흑도회(黑濤會)에서 활동하다 무정부주의자가 되었다. 1923년 그는 일본 황태자 히로히토(裕仁)를 암살하려고 폭탄을 소지했다가, 일본 경찰에 검거돼 사형을 언도받았다. 그후 무기징역으로 감형 받고 광복을 맞아 감옥에서 풀려나 귀국했다가, 6·25전쟁 때 납북되었다.

이 시기 경성고보에는 공산 사상을 흡수해 조국을 해방해야겠다고 생각한 학생들이 있었다. 박열보다 한 해 먼저 경성고보에 입학한 박헌영(朴憲永·15회)이 대표적인 경우. 박헌영은 그후 공산주의 운동을 주도하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서울 종로의 장안빌딩에서 1929년 해체된 조선공산당을 재건하였다. 박헌영은 그후 북한으로 넘어가 부수상을 지냈으나, 김일성에 의해 미국의 첩자로 몰려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1972년 남북적십자회담이 열렸을 때 자문위원 자격으로 서울을 방문했던 윤기복(尹基福·74)은 경기 40회다. 함남 북청이 고향인 그는 제1고보를 마치고 일본에 건너가 제3고에 들어갔다가, 광복 후 북한으로 넘어가 김일성대를 마치고 소련 모스크바대학에서 유학했다. 윤기복은 그후 대남 문제 전문가로 성장해, 조평통 부위원장과 로동당 대남담당 비서를 거쳐 범민련 북측 본부 의장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로동당 최고 기관인 중앙위원회의 위원과 최고인민회의(국회에 해당) 대의원을 맡고 있다.

두루마기 교복, 다이아몬드 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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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계열의 경성고보생들은 1926년의 6·10만세운동, 1927년의 동맹휴업 사건 등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학생들의 저항이 거세자 1922년 총독부는 고보의 수업연한을 중학교와 같은 5년으로 늘리고, 1924년에는 일본의 고등학교에 해당하는 '경성제대 예과'를 만들었다(경성제대 예과는 고등학교에 해당한다). 이로써 고보 졸업자는 일본에 있는 고등학교나 조선의 경성제대 예과에 진학하고, 경성제대 예과를 마친 다음에는 당시 조선에서는 유일한 대학이던 경성제대나 일본에 있는 대학에 응시할 수 있게 됐다.

1924년 경성제대 예과가 처음으로 신입생을 뽑았을 때 조선인 합격자는 44명이었다. 이중 1고보가 가장 많은 15명을 합격시켰고, 그 다음이 평양고보(6명), 대구고보(5명) 순이었다. 1고보 출신은 1등에서 10등까지를 석권했는데, 일본인을 포함한 전체 수석합격자는 훗날 고려대 총장과 신민당 당수를 지낸 유진오(兪鎭午·20회)였다. 이때부터 1941년까지 1고보(경기중)는 단 한번도 1위를 뺏기지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경성제대 예과 합격자는 1고보-2고보-평양고보 순으로 고착됐는데, 1고보 출신은 2위보다 3∼5배 많이 합격했다. '경기불패(京畿不敗)' 신화가 달궈지기 시작한 것이다.

경기고의 상징은 高자 옆에 백선 하나와 더불어 눕혀놓은 다이아몬드 모양의 배지와 이름표다. 다이아몬드형의 배지는 '1고보생은 다이아몬드와 같은 준재들이니 모름지기 자신을 갈고 닦아 더욱 빛나게 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당시는 배지를 '금장(襟章)'이라고 했는데 이 금장을 만든 이는 도화(圖畵·미술)를 담당했던 일본인 교사 기타가와(北川達友)였다. 기타가와 선생이 이 금장을 만든 데는 사연이 있다.

"예나 지금이나 여름방학이 되면 학생들은 고향으로 돌아가거나 전국 여행에 나서게 된다. 그런데 개중에는 물놀이를 하다가 익사하는 학생이 있었다. 당시 전국의 고보는 高자만 달린, 거의 비슷한 교모를 쓰고 있었다. 그래서 익사자가 고보생으로 판단되면 경찰은 무턱대고 제1고보로 '당신네 학생이 죽었다'고 연락해왔다. 이게 보통 성가신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1고보생을 타 고보생과 구분할 목적으로 다이아몬드 금장을 만들었다."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나고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일제는 조선을 중국 침략의 중간기지로 삼으려 했다. 내선일체(內鮮一體)를 내세워 창씨개명(創氏改名)을 강요하며 조선을 일본화하는 작업에 집중하게 되었다. 1938년 이러한 분위기를 반영해 새로운 조선 교육령(3차)이 선포되는데, 그 내용은 보통학교-고등보통학교(여자고등보통학교)로 된 조선의 학제를 일본과 똑같이 '소학교-중학교(고등여학교)'로 바꾼다는 것이었다.

이로써 외형상 조선인에 대한 차별 교육은 없어졌으나 조선을 일본과 동일시한다는 차원에서, 조선어 교육을 폐지해버렸다. 이에 따라 제1고보를 비롯한 전국의 고보들은 교명을 바꾸느라 고심하게 되었다. 1고보생들은 일본의 관립 고등학교가 설립 순서에 따라 1고-2고-3고로 불렸으니, 그와 마찬가지로 1고보가 1중이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1고보는 경성제1중학이 되고, 일본인이 다니던 경성중과 용산중은 경성제2중학과 경성제3중학, 조선인이 다니던 2고보는 경성제4중학으로 하자는 주장이 매우 강했다. 이러한 1고보생의 주장을 대변한 이가 1고보 교장인 일본인 와다(和田)였다.

日人 경기도지사가 京畿로 명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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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경성은 지금의 서울특별시처럼 경기도 등의 도(道)와 동급의 자치단체가 아니었다. 경성은 경기도의 도청소재지로, 경기도에 속한 '경기도 경성부'(府)였다. 따라서 공립학교로 전환한 후 1고보의 운영 주체는 경기도가 되었다. 경기도지사인 칸자(甘蔗義邦)는 1고보를 경성제1중으로 하고, 경성중을 경성제2중으로 하는 것은 "일본인의 자존심을 허무는 것"이라며 결사 반대했다.

이로 인해 와다 교장과 칸자 도지사는 상당한 언쟁을 벌였는데, 와다 교장이 물러서지 않자, 칸자 도지사가 직권으로 "제1고보의 명칭을 경기(공립)중학교로 정한다"고 공포해버렸다. 오늘날의 '경기고등학교'란 교명은 이런 과정을 거쳐 탄생한 것이다. 이렇게 되자 일인들이 다니는 경성중은 그대로 경성중이 되고, 제2고보는 경복궁과 가까이 있다고 해서 경복중(景福中)으로 개칭되었다.

교명 다툼은 지방 도시에서도 일어났다. 신의주에서는 일본인이 다니는 신의주중학이 있기 때문에, 신의주고보는 신의주동중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광주고보는 광주의 서쪽에 있다고 해서 '광주서중'이 되었고, 해주고보는 '해주동중', 전주고보는 '전주북중'이 되었다. 그런데 유독 평양에서만은 일본인이 다니던 평양중이 '평양1중'이 되고, 평양고보는 '평양2중'이 되었다. 그러자 흥분한 평양고보 학생들이 야밤에 평양중에 몰려가 평양1중 간판을 떼내는 소동을 벌이기도 했다.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동안 경기중 학생들은 다른 중학과 마찬가지로 각종 근로사업에 동원되었다. 교복은 국방색으로 바뀌었고 무릎 아래에는 각반을 차게 되었다. 연합군의 공습에 대비해 날마다 방공호로 숨는 훈련을 반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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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흥기 경기고등학교 교장

"수월성 교육에 관심을 가져달라"

재임 중에 경기고 100년을 맞게 된 민흥기(閔興基·58) 교장은 경기고 55회 동문이다. 민교장은 "평등 개념을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우리 사회는 평준화 교육을 두부모 자르듯, 정원수 자르듯, 기하학적으로 똑같이 잘라내는 것으로 생각해왔다. 그러다 보니 유전인자가 좋은 나무까지도 잘려나가고 특별히 맛있는 두부도 나오지 못하게 되었다.

이제 평준화 교육을 재검토해야 한다. 우리나라 수준의 국가 중에서 우리나라처럼 획일적인 평준화를 하고 있는 곳은 한 나라도 없다. 일본도 10년 전에 평준화를 그만두었다"고 지적했다.

현재의 교육 형편에서 특히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으로 그는 '수월성(秀越性) 교육'을 거론했다. 수월성 교육이란 능력있는 학생들에게 그들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계발하여 마음껏 발전시켜 나가도록 도와주는 교육을 말한다.

민교장은 영어교육 곧 과학교육 강화식의 과학 제일주의 사고방식에서 과학 분야의 수월성 교육만 강화하다 보니 인문사회 분야가 상대적으로 소홀해진 감이 있다. 인문사회 분야의 수월성 교육 기관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경기고는 훌륭한 전통과 어느 학교보다도 뛰어난 교육 환경을 갖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학부모와 동문들로 부터 열성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으므로 정부에서 수월성 교육기관을 뽑는다면 당연히 도전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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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고의 역사는 한국 중등교육의 역사다. 중학교에서 출발해 漢城高 · 京城高普 · 第1高普 · 京畿中을 거치며 100년을 채워온 경기는 평준화 이후 전혀 다른 환경을 접했다. 한때 경기는 경성제대 예과와 서울대 전체 입학생의 10% 이상을 차지했으나, 이제는 많고 많은 고등학교 중 하나일 뿐이다. 무한경쟁 시대를 헤쳐갈 인재를 필요로 하는 이 시대, 우리의 중등 교육이 가야할 방향은 어디인가. 경기인들은 하나 같이 수월성(秀越性) 교육이 필요하다고 강조하는데, 아직도 우리 교육은대중 교육과 엘리트 교육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있다.

이정훈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200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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